김익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64
한자 金翊東
영어공식명칭 Gim Ikd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 6월 21일연표보기 - 김익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2일 - 김익동 거창군 가조면·가북면 독립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31일 - 김익동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49년 9월 11일연표보기 - 김익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김익동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익동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김익동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840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익동 거주지 - 경상남도 거창군
활동지 김익동 활동지 - 경상남도 거창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아버지는 김추해(金樞海), 어머니는 김현(金鉉)이다.

[활동 사항]

김익동(金翊東)[1892~1949]은 1892년 6월 21일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840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加祚) 장날인 3월 20일 정오에 400명~500여 명이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고, 일제 경찰은 시위를 주도한 김병직(金秉直)·어명준(魚命俊) 등을 반죽음 상태에 이르도록 구타하여 헌병 분견대로 압송하였다. 이에 3월 21일에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에서는 3월 22일 거창 장날 만세 시위를 결정하고, 오문현(吳文鉉)·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어명철(魚命喆)·이병홍(李秉洪)·김호(金濩) 등 6명을 추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 누설되어 3월 22일 아침에 거창 주둔 일본군 헌병 분견대가 주동 인물들을 체포하여 취조에 들어갔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김익동이 이 소식을 듣고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가북면 주민 3,000여 명과 함께 당일 오후 2시경부터 주동 인물들의 석방 요구와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거창읍으로 나아갔다. 시위 대열이 사포현(沙浦峴)에 이르자, 거창의 일제 헌병대와 용산(龍山)의 일제 헌병 분견대가 합세하여 진로를 차단하고 공포를 발사하며 해산을 명하였다. 시위대가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으나, 일제 헌병이 무차별 발포로 맞서 현장에서 4명이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김익동은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어, 1919년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9년 9월 1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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