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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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克明 |
영어공식명칭 | Bae Geukmyeong |
이칭/별칭 | 미은(薇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진갑곤 |
거주|이주지 | 배극명 은거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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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산 |
대표 관직|경력 | 도총제(都摠制) |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호는 미은(薇隱). 흥안군(興安君) 배인경(裵仁慶)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장시(掌侍) 배격(裵格)이고, 할아버지는 배손신(裵遜伸)이다. 아버지는 소부 소윤(少府少尹) 배희보(裵希輔)이다.
배극명(裵克明)은 고려 말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렀다.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위에 등극하자 절의를 지켜 성주읍 예산리 고향 마을 도덕골[道德洞]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이에 태조(太祖)가 배극명을 지난 왕조의 명신(名臣)이라 하여 등용하고자 세 차례나 패초(牌招)하여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화를 내며 “충절은 전고에 비할 데가 없으나 따르지 않으니 품계를 내려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가 왕명을 받고 신하를 부를 때 가져가는 목패(木牌)인 패초를 받은 신하는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가 있어도 지정된 시간까지 입시하지 않으면 중벌에 처해지는 엄격한 법률이 있음에도 배극명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니 왕이 칭송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적인 화를 낸 것이다.
미은(薇隱)이라는 호가 암시하듯이 그 옛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은둔하며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채미가(采薇歌)를 부른 것처럼 배극명도 “옛 사람 그리워하여 탄식을 일으키니/ 산에 고사리 있어 캘 수 있다네[懷古人而興吁 山有薇而可採].”라고 노래하였다.
한편 『경산지(京山志)』와 배씨세적(裵氏世蹟)에 의하면, 성주 예동 마을은 당초 사례동(沙禮洞)이라 불리다가 와전되어 지금은 예동(禮洞)이라고 불리는데, 이곳은 고려 희종(熙宗) 때 봉열대부(奉烈大夫)를 지낸 배현보(裵賢輔)와 공민왕(恭愍王) 때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배극명이 살던 곳이라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