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32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3.1 Independence Movement|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7일연표보기 - 3.1 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6일연표보기 - 3.1 운동 종결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성주군 성주읍과 벽진면의 독립 만세 운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 파리 장서 운동
발생|시작 장소 3.1 운동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 지도보기|가천면 동원리지도보기
종결 장소 3.1 운동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현기|이상해|정길수|김명준|이계환|유진성|송회근|이태희|이봉희|여홍연|여우룡|여왕연|여문회|여호진|장명준|김준수|김팔수|성덕이

[정의]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성주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운동.

[개설]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3.1 운동은 3월 27일 선남면 소학동이현기(李玄琪)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과 가천면 동원동이상해(李相海)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을 필두로 4월 2일 성주면벽진면의 독립 만세 운동, 4월 3일 지사면 수륜동[현 수륜면 수륜리] 만지 시장의 독립 만세 운동, 4월 6일 가천면 창천 시장의 독립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3.1 운동, 즉 1919년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이미 도쿄[東京]에서 먼저 일어난 ‘2.8 독립 선언’이 시작점이다. 이때부터 5월까지 전국에 걸쳐 일어났고, 나라 밖에서도 한국인이 거주하던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경상북도에서는 3월 8일 대구 서문 밖 시장에서 만세 운동이 처음 시작되었고,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동 만세 운동으로 막을 내렸다. 꼬박 두 달 동안 80곳이 넘는 곳에서 90회 넘게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성주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7개 지역에서 각각 한 번씩 일어났는데, 시기는 3월 27일, 4월 2일, 4월 6일 등으로 다른 지역에 견주어 볼 때 조금 늦은 편이었다.

[경과]

성주군에서 3.1 운동이 시작된 곳은 선남면 소학동가천면 동원동이었다. 전자는 3월 27일 오후 2시경 이현기가 동네 주민들을 모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튿날 3월 28일 성주면 장날에는 장터에서 홀로 독립 만세를 불렀다. 후자는 가천면 동원동에 살던 이상해가 3월 23일 일꾼 김명준(金命俊)·정길수(鄭吉洙)와 청년 이계환(李桂煥) 등과 함께 3월 27일 저녁 7시에 독립 만세를 불렀다.

성주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의 절정은 4월 2일에 일어난 성주면 만세 시위였다. 4월 2일의 성주면 만세 시위 운동은 파리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 운동을 주도한 전통 유림이 장날에 맞춰 계획하고 추진한 것이었다. 한편, 당시 기독교 측에서도 대가면의 옥화동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이 장날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진성은 유림 세력도 같은 날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3월 말 유림 측의 송회근(宋晦根)과 만나 힘을 합쳐 함께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합의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 만세 운동이 시작되어 밤 11시가 넘도록 시위 군중들이 만세 시위를 펼쳤다. 이 만세 시위 운동에서는 일제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이름을 알 수 없는 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주도 인물 33명이 일제 군경에 체포된 후 재판에 회부되어 대구지방법원 또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월~6월 내지 1년~2년 형에 처해졌다.

성주면의 만세 운동은 벽진면으로 퍼져나갔다. 성주면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오던 해평동[현 벽진면 수촌리]의 여홍연(呂弘淵)여우룡(呂又龍)·여왕연(呂旺淵)·여문회(呂文會)·여호진(呂鎬鎭) 등과 밤 11시 해평동 월회당(月會堂) 앞 도로에서 동민 300여 명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만세 운동을 펼쳤다. 벽진주재소 경찰이 저지하자, 도무환(都武煥)이 “조선인들이 이같이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이를 저지하려는 너희들의 행동은 참으로 부당하다.”고 외치며 항의하였다. 여홍연 등 시위 주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여홍연은 징역 1년, 여우룡여왕연은 징역 8월, 여호진여문회는 징역 6월을 각각 선고받았고, 도무환은 태(笞) 90에 처해졌다.

4월 3일 지사면 수륜동의 만지 시장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청파면 신정동[현 수륜면 신정리]의 장명준(張命俊)·김준수(金駿秀)가 이날 오후 5시 무렵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자, 군중도 따라 나섰다. 일제 경찰이 주동 인물 3명을 붙잡았고, 그중 장명준과 김준수가 기소되었다. 5월 6일 장명준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고, 8월 16일 김준수는 징역 4월을 선고받았다.

그 뒤 4월 6일에 대가면월항면 안포동 두 곳에서 소규모의 만세 시위가 일어난 후 성주군의 만세 시위 운동은 마무리되었다. 성주군 대가면에서는 도남동김팔수(金八洙)·성덕이(成德伊) 등이 창천 시장 장날인 4월 6일 오후 5시경에 백개(白介)를 비롯한 청년 20여 명과 함께 창천주재소(倉泉駐在所) 맞은편의 대가면 후포 뒷산에 올라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김팔수·성덕이는 4월 28일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 같은 날 오후 12시경 월항면에서도 안포동 뒤편 언덕 위에서 이동근(李東根)의 주도로 3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불렀고, 주동 인물 2명이 붙잡혔다.

[결과]

경상북도 성주군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27일 시작되어 4월 2일 성주면 시장 만세 운동으로 정점에 이르고, 4월 6일 마무리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성주군의 3.1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늦게 시작되어 짧게 끝났지만, 그 규모는 매우 컸다.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한 유림과 기독교계의 연합 만세 시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제 군경의 탄압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한 독립 만세 시위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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