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역 벽서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07
한자 良才驛壁書事件
영어공식명칭 Yangjaeyeok Byeokseo Sageon|Case of Putting up the Poster in Yangjaeyeok that Criticised the Ruling Power
이칭/별칭 정미사화(丁未士禍)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47년 9월연표보기 - 양재역 벽서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47년연표보기 - 양재역 벽서 사건 종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권응정|권응창|정언각|이기|대윤|소윤|윤원형|윤임|윤원로|문정왕후|중종|인종|명종|노수신|유희춘|백인걸

[정의]

조선 명종 때 윤원형이 성주 출신의 인사를 포함하여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

[개설]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1547년(명종 2)에 일어난 사화이며,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권응정(權應挺)[1498~1564], 권응창(權應昌)[1500~1568] 형제가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권응정은 강진에, 권응창은 맹산(孟山)에 유배되었다.

[역사적 배경]

중종 말년부터 세자[인종]의 외숙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 일파와 경원 대군(慶源大君)의 외숙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 일파 사이에 알력이 심하였다. 중종의 뒤를 이어 세자가 즉위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어 어린 경원 대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소윤 세력이 대윤 중심의 상대 세력을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사림 계열의 인물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후에도 소윤 세력은 자신들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계속 도태하려 하였다.

[경과]

1547년 9월 부제학(副提學) 정언각(鄭彦慤)이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고 한 익명의 벽서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임금에게 바쳤다. 윤원형과 이기 등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면서 옥사를 확대하였다.

[결과]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하고,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鳳城君) 완(岏)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丁熿)·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난상(金鸞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그 외에도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이 많았다. 이 사건를 계기로 윤원형 일파에게 권력이 더욱 집중되었다.

[의의와 평가]

1565년(명종 20) 소윤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다.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 사건 자체가 무고로 공인되는 한편, 연루된 인물들을 여러 단계에 걸쳐 신원하였다.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익명의 벽서를 문제 삼아 정적 제거에 과도하게 악용한 정치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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