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성 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04
한자 星州城戰鬪
영어공식명칭 Battle of Seongju Cas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8월 19일~8월 20일 - 성주성 전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593년 1월 15일 - 성주성 전투 종결
발단 시기/일시 1592년 5월 18일 - 임진왜란 발발로 일본군에 의해 성주성 함락
전개 시기/일시 1592년 9월 10일~9월 11일 - 성주성 전투 전개
발생|시작 장소 성주성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성주성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배덕문|제말|김면|정인홍|곽재우|임계영|배설

[정의]

임진왜란 초기 성주 지역 의병이 중심이 되어 싸운 성주성 탈환 전투.

[개설]

1592년 성주성의 탈환을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전개한 전투이다. 치열한 공격을 통해 왜군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퇴각하도록 하여 성주성을 수복하게 만든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대군으로 빠르게 북상하자 성주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피신하기에 급급하였다. 성주판관 고현(高晛)도 젊은 무부(武夫)였지만 홀로 먼저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5월 10일 현풍, 5월 18일에 성주, 6월 12일에 개령(開寧)[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을 점거한 후 낙동강 수로를 장악하여 후방의 보급을 원활하게 하는 한편 북상한 그들 군대의 후방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성주에는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이 점거하여 거점을 지키면서 주변을 약탈하고 있었다.

[경과]

성주 인근의 낙동강은 왜군의 중요한 보급로였을 뿐만 아니라 약탈품을 수송하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역 의병들의 활동도 낙동강 연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이 각기 낙동강의 한 구역을 맡아 일본군에 대항하고 있었다. 성주의 의병으로 활동한 인물들은 의병장 배덕문(裵德文)을 비롯하여 약 49명이 확인된다. 주로 성주 의병장 배덕문이나 이웃 고을 의병장인 김면, 정인홍, 곽재우의 의병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제1차 성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19일~8월 20일에 김면의 의병과 정인홍의 의병이 연합하여 성주성에 웅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한 전투이다. 당시 성주성에는 8월경에 왜군 주력이 성주에서 개령으로 옮기면서 일부 병력만 잔류하고 있었다. 정인홍은 성주성의 왜적이 안언역(安堰驛) 전투 이후 고립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김면과 함께 성주성에 대한 연합 공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연합 의병은 성주성에서 남쪽으로 5리쯤[약 2㎞] 떨어진 가평 근처에서 공격을 준비하던 중 왜군 구원군의 기습을 받아 흩어지고 말았다. 제1차 성주성 전투는 의병이 왜군을 선제 공격했다는 점에서는 유의미했지만 준비와 전략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 전투였다.

제2차 성주성 전투는 1592년 9월 10일~9월 11일에 있었다. 다시 가평에 진을 치고 왜적을 성 밖으로 유인해서 격멸하여 1차 전투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동원된 군사는 김면과 정인홍 의병 각 1,000명씩 총 2,000명 정도의 군사가 동원되었고, 선봉장을 맡은 김준민이 성 밑으로 가 진퇴를 거듭하며 유인하였다. 왜군은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성 안에서 총만 쏘면서 지키기만 하였다. 다음날 개령의 왜군 본진에서 보낸 구원군이 불시에 들이닥쳤고, 대비를 못한 아군은 크게 무너졌다. 김면이 왜의 구원군에 대비하여 배설(裵楔)로 하여금 길목에 매복하여 차단하게 했으나, 배설이 명을 따르지 않아 왜의 구원군을 막지 못하게 된 것이 주요 실패 요인이었다.

제3차 전투는 1592년 12월 14일경에 있었다. 조선군은 10월의 진주성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른 후 승전의 여세를 타고 성주와 개령을 탈환하고자 하였다. 정인홍 의병진의 요청으로 김면 의병과 임계영이 이끄는 전라좌의병이 합세하고, 전라도 운봉과 구례의 관군 5,000여 명도 지원군으로 합류하였다. 12월 7일부터 성주성 주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산발적으로 벌이다가, 12월 14일에 임계영이 장졸 500여 명을 보내 성주성의 일본군을 기어이 유인하여 들판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목사 제말(諸沫)이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아 성안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이후 산발적인 조선군의 총공세에 위축된 성주성의 왜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593년 1월 15일 밤에 개령으로 철수했고, 조선의 의병 및 관군 연합군이 성주성을 수복하게 되었다.

[결과]

성주 인근 지역의 의병과 관군이 힘을 합쳐 수개월에 걸쳐 성주성을 공략한 결과 마침내 성주성을 수복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성주성 전투는 성주 지역을 왜군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개령 방면도 탈환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왜군을 선산 방면으로 쫓아내어 전라도 공격 계획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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